‘절제’란 무엇일까요? 살찔까봐 걱정하여 맛있는 것을 보면 참는 것이 ‘절제’일까요? 대체로 ‘절제’를 안 해야 하는 것을 하지 않을 때 절제라고 생각합니다만 이것은 50%만 맞습니다. 해서는 안 되는 일을 하지 않는 것과 더불어 마땅히 해야 하는 것을 하는 것도 절제입니다. ‘아침에 일찍 일어나야지!’ 마음을 먹었지만, 피곤해서 잠을 이기지 못하고 제시간에 일어나지 못할 때 절제력이 부족하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손님들한테 해가 져서 문을 닫을 때까지 일관되게 친절을 베풀어야지!’ 하면서도 오후가 되면 지쳐서 건성건성 해버리는 경우는 해야 할 마땅한 일에 절제력을 잃어버려서 발생되는 경우입니다.
성경에는 절제하지 못해 안타까운 결과를 초래한 사람들이 등장합니다. 에서는 식욕을 절제하지 못해 팥죽 한 그릇과 자신의 장자권을 바꿈으로 인해 믿음의 족보에서 누락되었습니다. 삼손은 한 여인에 대한 정욕을 절제하지 못해서 자기 힘의 비밀을 누설하는 바람에 결국 비참한 죽음을 맞게 되었습니다. 모세는 절제하지 못해서 불평하고 원망하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그만 화를 내는 바람에 약속의 땅인 가나안에 들어가지 못했습니다. 사울은 사무엘을 기다리지 못하고 그만 선지자가 해야 할 제사를 자신이 드렸을 뿐만 아니라 아말렉과의 전투에서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진멸하라는 명령에 순종하지 않고 전리품들 중 좋은 것을 남겨두었기에 그와 그 후손이 누릴 수 있었던 영원한 왕권을 잃게 되었습니다. 다윗은 자신의 정욕을 주체하지 못해서 간음과 살인죄를 저질러 그의 집안에 칼부림의 원인을 제공했습니다.
이렇게 생각하다보면 왜 절제가 성령의 9가지 열매 중 가장 마지막에 놓여 있는지 그 이유를 알 듯 합니다.
절제 없는 사랑은 싸구려, 헤픈 사랑이 될 수도 있습니다.
절제 없는 희락은 타인의 아픔을 외면하거나 더 아프게 할 수도 있습니다.
절제 없는 화평은 게으름과 나태로 연결될 수도 있습니다.
절제 없는 오래참음은 홧병을 만들고 한을 남길 수도 있습니다.
절제 없는 자비는 스스로 일어설 수 있는 힘과 능력을 가로막는 결과를 초래할 수도 있습니다.
절제 없는 양선은 완벽주의, 결벽주의가 될 수도 있습니다.
절제 없는 충성은 쉼과 기쁨이 없는 노동이 될 수도 있습니다.
절제 없는 온유는 이래도 좋고 저래도 좋은 줏대 없는 사람이 될 수도 있습니다.
‘절제’란 그리스도의 영광(榮光)과 교회의 건덕(健德)을 위해서 지혜롭게 과감히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은 하고 하나님이 기뻐하지 않는 일은 하지 않는 것입니다.